우리는 民族 中興의 歷史的 使命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祖上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自主 獨立의 姿勢를 확립하고, 밖으로 人類 共榮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敎育의 指標로 삼는다.
誠實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學問과 技術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素質을 啓發하고, 우리의 處地를 躍進의 발판으로 삼아, 創造의 힘과 開拓의 精神을 기른다.
公益과 秩序를 앞세우며 能率과 實質을 崇尙하고, 敬愛과 信義에 뿌리박은 相扶 相助의 傳統을 이어받아, 明朗하고 따뜻한 協同 精神을 북돋운다. 우리의 創意와 協力을 바탕으로 나라가 發展하며, 나라의 隆盛이 나의 發展의 根本임을 깨달아, 自由와 權利에 따르는 責任과 義務를 다하며, 스스로 國家 建設에 參與하고 奉仕하는 國民 精神을 드높인다.
反共 民主 精神의 透徹한 愛國 愛族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自由 世界의 理想을 實現하는 基盤이다.
길이 後孫에 물려줄 榮光된 統一 祖國의 앞날을 내다보며, 信念과 矜持를 지닌 勤勉한 國民으로서, 民族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努力으로 새 歷史를 創造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1월 18일, 이른바 ‘건전한 생활윤리와 가치관 확립’을 위한 헌장의 제정을 지시한다. 그해 여름 박종홍 서울대 철학과 교수가 초안을 잡고, 사회의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헌장 기초위원과 심의의원 44인을 선출하여 수정작업을 거쳐 총 393자의 헌장 전문을 완성한다. 당시의 원안은 당대 가장 미려한 도덕적 한글의 전형으로서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민족 중흥은 우리 국민의 거룩한 역사적 사명이다. 조상의 밝고, 의롭고, 슬기론 얼을 현대에 되살려 자주의 자세를 확립하고, 합심·단결·노력과 약진 속에 창조의 기쁨과 삶의 보람을 느낀다.
타고난 성능의 계발을 바탕으로 널리 학술과 기능을 배우고 익혀, 저마다 직분에 따라 힘써 일하되, 성실한 인격에 뿌리 박고, 자유에 따르는 책임, 권리와 같이 하는 의무를 줄기삼아, 협동 신의의 민주사회를 이룩한다. 국법을 지키고, 중의를 따르며, 국민의 복리에 골고루하여, 전체의 안정과 번영을 기약하고, 생산과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합리의 새 생활에, 효도와 우애, 서로의 은혜에 감사하며, 고상한 멋을 아는 전통의 미풍양속을 이어받아 국가 사회의 건전한 기풍을 일으킨다.
나라와 나는 하나인 것, 언제나 나라 사랑을 내몸같이 모든 일에 부지런하며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는 굳센 의지와 튼튼한 몸으로, 새롭고 우렁찬 국가 건설에 즐거이 봉사한다.
우리의 신념은 섰다. 반드시 이 땅 위에 통일조국의 빛나는 앞날이 올 것이요,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은 나아가 인류의 이상 실현에 이바지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영광의 새 역사를 창조하고 그대로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자.

저 장황한 문장은 놀랍게도 8문장으로 되어 있다. 이 원안은 보다 간결하고 명확한 문장으로 총 6차례에 걸쳐 수정되었다. 이 문장의 구성에 관한 홍윤기 교수의 분석은 매우 흥미롭다. 그는 이러한 문장의 자기모순성이 의식되지 않았거나 혹은 의식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을 넘어서는 ‘관념적 초월논리’ 때문이라고 보았다.

사실 이 문장은 여러 측면에서 1890년 10월 30일 선포된 일왕의 ‘교육칙어’와 심각하게 닮아있다.

저는 우리 일본이, 선조들의 ‘도의국가실현’이라는 원대한 이상을 기초로 생겨난 나라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충효라는 양대 기본을 주축으로, 전국민이 합심하여 노력한 결과, 오늘날에 이르는 훌륭한 성과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는 원래 타고난 일본의 국체가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더불어 저는 교육의 근본 또한, ‘도의입국’을 달성하는데 있다고 믿습니다.
국민모두는, 자식은 부모에 효를 다하고, 형제 자매는 서로 힘을 합쳐 도우며, 부부는 사이좋게 지내며, 친구는 서로 믿으며, 그리고 자신의 언동을 신중하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손을 뻗어 학문에 힘쓰며, 직업에 전념하고, 지식을 쌓으며, 인격을 닦고, 더욱 나아가 사회공공을 위해서 공헌하며, 또 법률이나 질서를 지키는 것은 물론이며,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신명을 다해서 나라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선량한 국민으로서 당연한 것 뿐만이 아니라, 또 우리들의 선조가 지금까지 물려준 전통적 미풍을 한층 밝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국민이 걸어가야 할 이 길은 선조의 교훈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변하지 않는 바른 가르침이기 때문에, 나도 국민 여러분과 같이, 조상의 가르침을 가슴에 안고 훌륭한 일본인이 되도록 마음으로부터 염원합니다.

패전 이전의 일왕의 ‘교육칙어’가 80여년 후의 박정희의 ‘국민교육헌장’과 닮아있는 것은 일본의 군국주의와 당시 우리의 군부독재라는 현실에서 볼 때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위 두 헌장은 매우 닮아있지만, 그렇다고 ‘국민교육헌장’이 ‘교육칙어’를 토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에 있어서의 ‘교육칙어’는 우리의 ‘국민교육헌장’과 마찬가지로 극우의 정신적 토대이며, 상징이다.

‘국민교육헌장’은 11월 26일, <국민교육헌장제정에대한동의의건>으로 상정되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왜 장장 1년에 걸친 ‘국민교육헌장’ 장정에 나섰던 것일까. ‘국민교육헌장’의 사전적 제정배경은 크게 4가지다. 1)조상의 훌륭한 전통과 유산이 계승 ·발전되지 못하고 있고, 2)물량적 발전에 비하여 정신적 가치관 사이의 조화로운 융합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고, 3)국민의 국가의식과 사회의식이 결여되어 민족 주체성이 결핍되어 있고, 4)국민교육의 지표가 불분명하여 학교교육에서 정신적 ·도덕적 교육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는 시대적 ·환경적 여건의 불합리성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국민교육헌장’을 초장·중장·종장으로 나누어, 초장에서는 한민족의 긍지와 사명의식을, 중장에서는 생활의 규범 ·덕목을, 종장에서는 조국통일의 실현과 민주주의 발전을 강조하고 있다...고 씌여있다. 요점은 ① 민족주체성의 확립, ② 전통과 진보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 ③ 개인과 국가의 조화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으로 정리하면 100점이겠다.

왜 박정희가 ‘국민교육헌장’이라는 대대적인 이념작업에 돌입하여야 했는가는 홍윤기 교수의 표현이 가장 타당하다. “박정희 권력은 일종의 ‘국가기생적 독재권력’이었으나 당시의 박정희에게는 허약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난 뒤의 그 권력과 권위의 공백을 메우면서 대중의 자발적인 복종을 끌어내어 파시즘 권력을 공고화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도자의 안정된 권위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에게 ‘도덕적 권위’와 ‘교육의 구심점으로서의 중후한 권위’를 부여하였다. 이 ‘정신적 주문’을 토대로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해 ‘영도자적 지위’를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의 전폭적 추진과 사회지도층의 암묵적 카르텔에 의해 성공적으로 교육현장에 뿌리내린다. 모든 의식행사, 교과서, 영문판까지 도배되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정권의 말기인 1978년, 연세대 성내운 교수와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이 주축으로 국가주의적 교육이념으로서의 ‘국민교육헌장’이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교수들의 서명을 받으려다 적발되는 ‘우리교육지표 사건’이 발생한다. 두 사람은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퇴직과 함께 구속되었다.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던 1988년에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교육헌장 개정 또는 폐기문제가 대두되었으나 흐지부지되었고, 대전엑스포가 개최되었던 1993년에 다시 거론되어, 1994년에는 ‘군사 권위주의의 잔재’로, 일제가 황국신민교육을 위해 만든 '교육칙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 작년 9월 4일에는 경기도의회 진종설 의원이 “국민교육헌장은 개인과 사회, 국가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시키고 앞으로 국민이나 국가가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라며 “도교육감에게 도내 학교에 보급할 것을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는데, 나름의 논리도 있다. “독재자의 통치이데올로기로 활용됐다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국민교육헌장은) 교육의 근본 지표를 밝힌 것”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무려 “도교육의 지표”로까지 삼아야 한다고 주장해 상당한 뒷북을 치신 바 있다. 마지막까지 그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는데, “동북공정이나 독도문제와 같이 외세와의 갈등이 첨예해져 국민들의 역사의식이 강조되고 물질문명의 발전으로 정신문화가 피폐해지고 이기주의가 만연해 있는 오늘날 더욱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협박도 불사했다.

생각건대, 이 ‘국민교육헌장’은 박정희의 바람대로 상당한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이라는 네 글자만 나오면 피가 거꾸로 솟을만한 투철한 애국심을 발현시키고 있으며, 왠만한 정치적 횡포에는 이력이 난 착한 국민이 작은 체구에 밤낮없이 일하는 근성의 나라로 ‘기브 미 초코렛’과는 영원히 안녕이 아니었던가.

[횡포] Hey,  |  2007/02/10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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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0 02:25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국민교육헌장에 이런 일이 얽혀 있군요. 제가 대한민국 네 글자에 항상 피가 끓어 오르는 것은 이 것 때문일까요...^^
2007/02/10 11:58 수정/삭제
쓰다보니 오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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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우유
2007/05/22 01:25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좋은글?
요즘 아그들은 다시 국민교육헌장 암기시켜야 될것같던데...
2007/05/22 11:17 수정/삭제
그런 의도의 글은 아니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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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2 17:02 댓글에 댓글수정/삭제
그래서 국민교육헌장의 문제점이 극우의 목적 이라는것, 복종을 이끌어내기위한 목적 때문이라는 건가요??
2011/03/24 01:09 수정/삭제
우선, 꽤 오래된 글인데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__)

제 글이 잘못 전달된 것 같네요.
저 글의 뜻은 국민교육헌장이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을 안고 태어났고,
오늘의 시대에 재고해 볼 필요가 분명히 있다는 요지로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적어도 아직도 저 문장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외우도록 시키는 교육을 자행하는 분은 안 계시겠지요.
그런 여러 가지 정황적인 내용들을 생각해보시게 하기 위한 기본적인 자료일 뿐입니다.

헌장이 제정된 시기와 지금의 우리는 아시다시피 정치·사회적으로 상당히 달라진 환경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그 제정의 배경과 각 문장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고,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글을 쓸 당시 상당히 이슈가 되었던 사안입니다.

그리고 국민교육헌장이 교육칙어를 토대로 하였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상당한 영향 또는 유사성과 관계한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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