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은희경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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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친구 중에는 세상의 인연이 다 번뇌라며 강원도 어느 절로 들어가다가, 시외버스 안에서 군인 옆자리에 앉게 되어 두 달 만에 결혼한 애가 있다. … (그) 군인과 결혼한 친구는 결혼한 지 1년도 안돼 총기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그녀는 언젠가 강원도로 떠날 때처럼 또 사람이 싫어졌다며 자동응답 전화기를 사러 나왔다. 그러나 전화를 해보면 언제나 벨이 세 번도 울리기 전에 그녀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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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책들은 왜 하나같이 해서는 안될 사랑을 하거나 이루지 못할 사랑을 하거나 오래된 사랑을 하고 있을까. 유부남과 사랑을 하고 임신을 하고 중절수술을 하고. 애절하게도 사랑했던 사람이 실은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남매였다거나 그 충격으로 자살을 했다거나. 이별, 망각, 죽음과 같은 것들은 언제나 소설책 속에 집요하게 달라붙어있다.

  기껏 한숨을 쉬며 읽어놓고 그간의 읽은 소설책들을 싸잡아서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영화에 나오건, 활자로 찍혀 책에 쓰여 있건, 누가 봐도 충격적이거나 비난받아 마땅할만한 일들이 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 도처에 일상적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99년 초판 되어 같은 해 중판된 1999년판. 이 책은 2000년까지 중판되다가 2006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다시 나왔다. 빠스떼르나끄가 했고 그 이전에는 A.S. 그리보예도프가 했다던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가볍고’, ‘날렵하고’, ‘재미있다’는 은희경의 소설은 사실 조금 어렵다고 보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활자 자체는 수월하게 읽히고 그럴싸한 감동도 얻을 수 있겠지만,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본인과 같은 비전문가에게는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은희경 특유의 ‘농담’이 본인에게는 쉽지만은 않았다.

  은희경의 가족이나 결혼 제도에 대한 부정적 포즈가 실은 그것들에 대한 숭고함을 방증한다는 방민호의 해설은 타당하다. 또한 이러한 은희경 특유의 허무주의, 제도에 대한 패배감, 인간성에 대한 회의가 특유의 ‘농담’으로 은유되고 때로는 ‘서정’이라는 미망에 빠져든다는 지적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긴 해설 속에서 본인이 동감했던 부분은 이것 뿐이다. 특히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해설은 난해하기도 하였거니와 순수한 독자로서는 불편하기까지 하였다)

  한 편,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순응적이거나 적어도 적극적으로 체제에 대항하지 않는다. 현실의 권력구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거부감이 없고, 등장인물은 투덜댈지언정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자 도모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실에 순응하거나 혹은 체념하며 과거의 회상에 담대해 하는 인물들인 것이다. 따라서 용서나 참을 수 없는 변절, 저항과 같은 감동의 기제들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작품은 구절구절로 보자면 독자대중의 공감을 부를만한 대목들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무슨 시구처럼 일부의 구절이 인용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것들 중 대부분이 그 구절만을 읽기에는 감동스러우나 작품에 있어서는 단절된 어느 한 구절이 아니라 전체 맥락을 통해서 함축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Aladdin  |  2007/03/1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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