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살기도 어렵다
‘뉴라이트’라는 ‘이름’ 붙이기에 대하여

다소 고답적이기는 하지만, 계절에 맞게 ‘꽃 이야기’ 한번 해 볼까요.

지금 제 책상 위에 장미 한 송이가 놓여 있습니다.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저’의 ‘장미’이지요. 장미는 어느 꽃집에나 수두룩하게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장미라는 일반적인 이름이 붙여진 채 놓여 있을 따름이지요. 누군가에게 팔리지 않으면 아마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고, 쓰레기장으로 직행할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난 해 작고한 시인 김춘수(1922-2004)의 가장 유명한 시는 「꽃」입니다. 아마 저와 비슷한 연배들은, 중, 고등학교 시절 이 시를 ‘연애시’로 읽고 공책 한구석에 시 전문을 베껴 두었던 낭만적인 기억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시 중에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야 ‘꽃’이 된다는군요.
음, 나의 빛깔과 향기에 맞는 이름이라!

캠퍼스 곳곳에 그 강렬한 향이 특징인 라일락이 꽃 봉오리를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로 지나다니는 학생들은 정녕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낭만적인 연애와 자유에 대한 몽상이 떠오를 법한 풍경이지요.
‘연애, 자유’!, 참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연애, 자유’, 이런 2음절어가 주는 매력은 탁 내뱉고 입을 닫아버린다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괜한 말의 여운을 만들지 않는 데 오히려 산뜻하고 냉정한 맛이 있지요. 우리말만 그런가 했더니 ‘프랑스 말에서 위대한 말, 시적으로 지배력을 가진 말들은 두 음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도 있군요.

그렇습니다. 자유 !, 참 좋지요. 만해처럼 불교적 형이상학의 깊은 품을 갖지 못한, 저 같은 범상인으로서는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라고 말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자유! 라고 한번 말해 보십시오. 순간, 우리 스스로 내면적인 자유를 좀 얻은 듯하지 않습니까. 일상이 아무리 너저분해도 말입니다.

요즘 ‘자유주의’, ‘뉴라이트’ 라는 말이 새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뉴라이트 운동’을 표방한 자유주의 연대를 비롯한 몇몇 단체의 활동 때문인 듯합니다. 제가 쓰는 이 칼럼의 ‘거주지’도 ‘뉴라이트 웹진’이지요. 그런데 이 ‘뉴라이트’를 놓고 말이 많습니다. ‘자유주의 연대가 뉴라이트의 소유권을 주장했다’고 하면서, 자유주의 연대를 향해 ‘뉴라이트가 당신들의 독과점 품목이냐’ 공격합니다. 자유주의 연대에서는 그들을 향해 ‘당신들이 뉴라이트를 표방할 자격이 있느냐’ 라고 비판합니다. ‘뉴라이트’를 길거리의 ‘흥행물 천사’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자유주의’든 ‘뉴라이트’든 무슨 꾸어다 놓은 보릿짝이 아닌 바에야, 오뉴월 땡볕 아래 늘어 놓아야 제 맛이지요. 요즘처럼 흑백 논리와 독선과 아집의 담론이 거센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지요.‘자유주의’ 든, ‘뉴라이트’든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말이고, 또‘만인의 것’이어야 하는 법이지요. 이는 ‘공자, 맹자 말씀’일 정도로 지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논란이 나오는 것일까요. 이 논란은 ‘이름 짓기와 부르기’의 전략과 관계있는 듯합니다. 서두에서 말한 김춘수 식으로 보자면요. ‘뉴라이트’가 누구나의 것일 ‘수’는 있지만 또 그렇다고 누구나의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뉴라이트’운동은 작년 11월 자유주의 연대 창립을 시점으로 대중들에게 그 이름이 알려져, 그 이념과 정체성이 비교적 뚜렷하게 각인된 운동입니다. ‘뉴라이트’하면 이제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특정한 단체의 목적과 성격과 지향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에서 그 사람의 외모와 성격, 그 사람과 관련된 특정한 이미지를 선명히 기억해 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요. 말하자면 ‘자유주의 연대’와 ‘뉴라이트’ 사이에는 이미 어떤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뉴 라이트의 이름에 무임승차하지 말라’는 것은 이 같은 ‘이름 짓기와 부르기’가 작동하는 원리에 근거한 주장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역사상 ‘자유주의’나 ‘라이트’를 표방한 정치 집단이나 각종 단체들이 얼마나 많이 명멸했는지요. 그렇습니다. 누구나 다 ‘자유주의’를 말할 수 있고, 말해 왔으며, ‘뉴라이트’를 표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뉴라이트’는 자유주의 연대 등 특정한 단체들이 ‘이름’을 붙인 뒤, 세인들에게 그 ‘이름’이 각인되고 통용된, 바로 그 특정한 ‘이름’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전까지 그 어느 것에도 이 ‘뉴라이트’라는‘이름’이 붙여진 적은 없었으며, 어느 누구도 그 ‘이름’으로 불려진 적도 없었던 것이지요.

자유주의 연대가 표방한 ‘뉴라이트’는 우리 사회에서 이제 처음으로 특정한 ‘빛깔과 향기’를 지닌 운동이자 ‘의미있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자유주의 연대가, 자유주의 연대의 정체성과 다르다고 판단되는 단체에서 ‘뉴라이트’라는 이름을 사용하자, ‘너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다른 이름을 붙이라’고 요구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니었을까요.
아무튼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지만, ‘꽃되기’도 어렵고 ‘꽃으로 살기’는 더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 이제는 뉴라이트인가?!
이 글은 왠지 민태원의 「청춘예찬」과 느낌이 비슷하다. 별로 낭만적이지 못한 현실이 '꽃'처럼 예쁘게 포장되었지만. 한때는 소위 지식인들 사이에서 리버럴리스트로 불리길 희망했던 것이 아마 유행이었던 것 같다. 특히 유학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리버럴"이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하면) 해방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에는 "뉴라이트"에 속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서로 뉴라이트라며 불길처럼 번지는 저속한 유행으로 또 맥없이 시들어가지는 않을까 우려가 된다. "뉴라이트", 참 멋진 말이다. 또 그만큼 어려운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지식인 사회에서는 "네오콘"이니, "진보" 성향이라는 표현은 지양하는 편이라는 거다. "진보"적이라는 표현을 쓰면, 학자가 중립을 지키지 못한다고 손가락질 당하고, 섣불리 보수라는 표현을 썼다가는 "수구보수"라고 손가락질 당하기 쉽상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그만큼 신념이 강한 지식인도 드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득 김규항의 명쾌한 표현대로, 보수는 '진보를 선택하지 않은 모든 상태'라고 푸념했던 것이 생각난다. 매력적인 용어 덕을 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아-

[타인] yours  |  2006/02/17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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